추위를 피하고자 카페에 들어선지 반시간이 지나던 도중이었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1시간의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여 산 그것은 맹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분해하고 있던 시점, 내 옆 건너로 두 남자의 대화가 들려왔다.

일단 내 또래 쯤 돼보였던 한 남자는 올해 수능을 치른 재수생이었다. 그는 흔히 말하는 대전의 BMW 탑승예약자인 듯했고 옆의 남자는 그의 잠정적 선배가 될 친구였다. 그는
“야, 나 삼수나 할까?”
하는 말을 필두로 양껏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이후 그 둘의 대화는 뻔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은 부모님을 향한 죄송함이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되었고 사회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앞으로 받을 자신들의 처우와 감수해야 할 책임들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온갖 미래에 대한 푸념으로 가득 차 긍정적인 것이 낄 자리가 없던 와중에
그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위치를 각인시키는 작업을 한다.

“에이 뭐, 시팔. 그냥 이래 살아야지 어케하겠냐.”

자신들의 앞날은 이미 정해진 것 마냥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단정.
무심코 내뱉은 그 말은 내게까지 날아와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다. - 현시점의 내게는 더 없는 불편함과 죄의식을 불러일으는, 죽음보다 더한 평생의 업보 같은 것...
그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존심도 건드렸을까. 그들은 곧이어 실없는 농담 몇 가지로 자신들의 처지를 위로했다.

사실 그들은 우리들에 대한 사회의 정의를 자기비하와 연민으로 승화시켰을 뿐이다.
그들이 떠들어댄, 지잡대생들이 견뎌야 할 숙명은 사회구성원 다수가 인정하는 일종의 관례와 같다. 이를 두고 보면 이들의 한탄은 매우 합리적이며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비생산적이다 못해 혐오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이는 비단 나만이 품고 있는 생각은 아니리라.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부모님은 내게 이 ‘패자’들의 넋두리를 들려주려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그들은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일꾼들을 본받으라.’하고 자신 있게 얘기하겠지. 하지만 내 꼴을 보자. 나는 그들과 똑같은 존재일 뿐이다. 살아온 평생을 그들을 내리깔라 배워왔던 내가 패배자로 전락했다. 이로써 내 존재는 성공한 자들의 주장에 더욱 힘을 불어넣어주는 하나의 전시물에 불과해졌다. 나는 훗날 그 어떤 ‘공정한’ 처우가 가해지라도 감내해야하는
완전무결한 존재로 탈바꿈한 셈이다.

이 순간만큼은 내게 있어, 학벌의 족쇄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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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가 제 열등감을 볶아댔었습니다. 방 밖을 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컴퓨터에 빠져 들었고, 사회생활이라곤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대학 입학을 한 뒤에 그 생활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자존감은 바닥을 달렸습니다. 학과에서도 나름 높은 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비관은 뚜렷이 들었죠.

한마디로 저는 그때의 대학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약간의 수치심마저 들었죠. 당시의 제 최대 관심사는 이런 감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데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반수를 하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술에 미련이 남아 예술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꼴에 자존심을 내세우고자 최상위에 속한 대학에 지원했었죠.
나름의 노력을 쏟았고, 그 수고가 인정되었는지 예비1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표로 했던 곳은 충원이 거의 나지 않는 곳이라 반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망이었죠. 최악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저는 제 진로에 대한 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언제 한 번은 반수와 관련하여 친형에게 일방적인 구타를 당한 적도 있었죠.

게다가 대학은 저를 '붙여주기는 아리까리한데, 막상 버리기는 아까운 놈'이라며 예비를 준 데다 상황은 개선된 게 전혀 없었습니다. 이미 꿈은 꿈이 아니게 된 지 오래였고요.

이 상황에 저는 다시 한 번 좌절하였습니다.

대학은 꾸준하게 저를 옭아매여 올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고 구차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다시 두 달 간 폐인과 같은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털썩 주저앉다 못해 쓰러졌던 거죠.

이런 저를 보고 만나는 이들마다 저에게
"가슴이 아프다"
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담긴 속뜻은
'네 입시 결과가 안타깝다'가 아닌,
'이렇게 무너져 일어서지 못하는 네가 안쓰럽다' 였습니다.

정말.. 누가 제 뒤통수 몇 대를 크게 쌔린 느낌이었습니다.
정신이 바짝 들더군요. 대학이란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나를 갉아먹으려 들었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 말들이 점차 저만의 세계에서 나와 밖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태생 때부터 경쟁을 부추기는 우리나라의 비정상적인 입시문화의 피해자이며 목격자인 동시에 지지자였습니다.
언제부터 나 자신을 학대하고 짓눌렀는지 그 기억조차 흐물하고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이유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명확한 것은,
남이 규정해놓은 길에 내 몸뚱이와 내 정신을 내맡기기 위해 내가 세상에 내던져진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가 어쭙잖은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별거 없습니다.
이 글을 보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생각의 시간을 제공할 수 있었더라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시생으로서, 입시의 '낙오자'로서의 삶이 그렇게까지 절박해야만 하고, 절망적이여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글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한 부분으로 끝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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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살아내는 것

당신 마음 속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 인내하라.

잠긴 방처럼, 외국어로 씌어진 책처럼 의문 자체를 사랑하려 하라.

답을 구하지 말라.

당신이 답대로 살 수 없겠기에 답은 올 수도 없다.

요지는 모든 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지금은 의문을 품고 살라.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답 속에 살게 될 날이 올 것이다.